1916년, 제1차 세계대전의 한가운데에서 조용히 체결된 하나의 비밀 조약. 이 조약은 오스만 제국의 몰락 이후 중동 지역을 어떻게 나눌지를 결정한 협정으로, 바로 **사익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입니다. 단 한 장의 지도가 그려낸 이 협정은 오늘날까지도 중동 지역의 혼란과 갈등, 분쟁의 근본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중동에 대한 각자의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국경선을 그었고, 이로 인해 수많은 민족과 종파가 강제로 갈라지거나 억지로 한 국가 안에 묶이게 되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사익스-피코 협정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어떤 배경과 내용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오늘날의 중동을 형성했는지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1. 사익스-피코 협정의 배경: 열강의 그림자
19세기 말부터 오스만 제국은 '병든 사람(The Sick Man)'이라 불리며 점차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제국 내의 여러 민족과 종파들은 독립을 갈망했고, 유럽 열강은 이러한 틈을 노려 제국의 땅을 분할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특히 영국은 인도로 향하는 통상로와 페르시아만 유전 지대에, 프랑스는 지중해 연안인 시리아와 레바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14년, 오스만 제국이 독일과 동맹을 맺고 전쟁에 참전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이 끝난 후 이 지역을 어떻게 나눌지 비밀리에 논의하게 됩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사익스-피코 협정입니다.
2. 협정의 주체와 내용: 식민지 외교의 결정판
협정의 이름은 영국 외교관 마크 사익스(Mark Sykes)와 프랑스 외교관 조르주 피코(François Georges-Picot)의 이름을 따왔습니다. 협정은 러시아 제국도 참여한 3자 간의 협상이었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레닌이 이를 폭로하면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됩니다.
사익스-피코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프랑스는 시리아, 레바논, 터키 남부 일부 지역을 차지한다.
- 영국은 바그다드, 바스라, 팔레스타인 남부 등 유전 지대를 확보한다.
- 팔레스타인은 국제 관리 지역으로 설정되며, 후에 유대인 국가 건설 지지 선언(밸푸어 선언)으로 이어진다.
- 나머지 아랍 지역은 ‘독립국’ 형태로 자치되지만, 실제로는 영국과 프랑스의 보호령이 된다.
이 협정은 중동의 민족, 종교, 문화적 경계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오직 열강의 이해관계에 따라 국경을 그었기 때문에 이후 수십 년간의 갈등의 단초를 제공하게 됩니다.
3. 중동의 민족·종파 혼재 속 ‘직선 국경’의 문제
사익스-피코 협정의 최대 문제는 중동의 복잡한 민족·종파 구성을 철저히 무시한 점입니다. 시아파, 수니파, 쿠르드족, 드루즈, 아시리아인, 알라위파 등 다양한 집단이 함께 살던 지역을 외세가 자의적으로 나눈 결과, 많은 지역에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예를 들어, 이라크는 시아파와 수니파, 쿠르드족이 섞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고, 이는 후에 후세인 정권 붕괴 후 내전으로까지 이어지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시리아 역시 복잡한 종파 구성과 직선 국경의 충돌로 인해 국가 정체성이 혼란스러워졌고, 이는 2011년부터 이어진 내전의 배경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4. 아랍인의 배신감과 민족주의의 부상
흥미로운 점은, 사익스-피코 협정과 거의 같은 시기 영국이 아랍인에게 독립 국가 설립을 약속했다는 점입니다. 후세인-맥마흔 서신에서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협력을 대가로 아랍 독립을 보장하겠다고 했지만, 사익스-피코 협정은 이 약속을 철저히 무시했습니다.
이로 인해 아랍 사회는 깊은 배신감을 느꼈고, 이는 강력한 아랍 민족주의 운동으로 번져갔습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알려진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조차도 이 조약이 영국의 기만임을 알고 깊은 실망을 표현했습니다.
5.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사익스-피코 협정의 충돌
사익스-피코 협정과 이슬람 세계의 반발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아라비아의 로렌스’로 알려진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Thomas Edward Lawrence)"입니다.
영국의 고고학자이자 군사 전략가였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 정보국의 일원으로 아랍 반란을 지원하며 후세인 가문과 손을 잡고 오스만 제국에 맞서 싸웠습니다. 로렌스는 중동 지역의 문화와 언어를 깊이 이해한 서구인으로, 실제로도 아랍 부족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며 전략적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아랍인들에게 영국이 독립국가 수립을 지지한다는 약속을 굳게 믿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는 후세인과의 협력 과정에서 영국 정부가 사익스-피코 협정이라는 전혀 다른 계획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거나, 혹은 완전히 알게 된 시점에서도 충격에 빠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로렌스의 고백
전쟁 후, 로렌스는 자신의 저서 《지혜의 일곱 기둥》(Seven Pillars of Wisdom)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아랍인들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며, 내 말이 배신이었음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아랍인들을 도운 것이 아니라, 결국은 서구 열강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었음을 절감했고, 이 사실에 깊은 자책감을 느꼈습니다. 이후 그는 명예와 권력을 거부하고 조용한 삶을 선택했으며, 이는 영국 내에서도 전설이자 비극적 인물로 기억되게 됩니다.
- 대중문화 속 로렌스
그의 삶은 1962년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로도 제작되었고, 이 영화는 오리엔탈리즘과 제국주의의 교차점을 예술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로렌스는 서구가 중동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대해 복합적이고도 상징적인 인물로 회자됩니다.
6. 협정의 장기적 후폭풍
사익스-피코 협정은 단기적으로는 열강의 이익을 보장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중동의 불안정성과 분쟁 구조를 고착화했습니다. 주요 후속 영향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이라크: 시아파, 수니파, 쿠르드족이 한 국가 안에 통합되며 내부 갈등 증폭
- 시리아: 소수 알라위파가 정권을 장악, 이후 내전으로 이어짐
- 팔레스타인: 국제 관리 지대였으나 영국의 밸푸어 선언으로 유대인 국가 지지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 쿠르드족: 독립된 국가 없이 여러 나라에 분산 → 지속적인 독립 투쟁
이처럼 사익스-피코 협정은 물리적 경계만이 아니라 정체성과 충돌의 틀을 만들어낸 조약이었습니다.
6. 국제사회의 반응과 현대의 해석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 정부가 협정을 폭로하면서 전 세계가 이 조약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많은 이슬람 세계는 이를 두고 “서양 제국주의의 위선과 기만”이라 평가했습니다. 20세기 후반에는 사익스-피코 체제를 해체하자는 목소리가 강해졌고, 오늘날에는 이 조약이 만든 틀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예:
- 이라크의 쿠르드 자치정부
- 시리아의 사실상 분단된 내전 지도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국 해법 논의
7. 포스트 사익스-피코 시대?
일부 학자들은 현대 중동이 포스트 사익스-피코 시대에 진입하고 있다고 봅니다. 미국의 중동 영향력 약화, 러시아·이란의 개입 강화, 터키의 국경 재설정 시도 등은 기존 질서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이제 중동은 새로운 경계를 그릴 수 있을까요? 아니면, 또 다른 강대국의 이익에 따라 새로운 ‘사익스-피코’가 그려질까요?
8. 결론: 선 하나가 만든 100년의 갈등
사익스-피코 협정은 종이 위에 그어진 선 하나로 인해 수많은 삶을 바꾼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국경은 다시 그릴 수 있지만, 그로 인해 발생한 불신과 고통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중동이 겪는 정치적·사회적 불안의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협정을 반드시 되짚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지금 그리고 미래의 국제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것.
지도에서 국경을 긋기 전에,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야 합니다.